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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사실은 바스크인을 제외한 여러 반도 민족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로마인에게서 법률과 언어인 라틴어를 물려받았다. 언어는 갈리시아, 카스티야 및 카탈로니아의 영토에 따라 다르게 진화했다.
5세기부터 300년동안 수에비, 반달족, 알란족과 같은 몇몇 야만인들이 고대 히스파니아 (*이스파니아 : 로마사람들이 사용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옛 명칭)에 도착했지만 모두 페레네 산맥에 말을 타고 왕국을 건설한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서고트족은 두드러진 문화적 또는 경제적 기여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복종하는 대가로 그들의 특권을 존중한 히스파노-로마 카시크(*Cacique : 카시크는 바하마, 대앤틸리스 제도, 북부 소안틸레스 제도와 유럽에서 접촉하는 원주민인 타이노(Taíno) 부족의 족장이었으며, Cacique는 처음에 스페인어로 “왕” 또는 “왕자”로 번역되었음)와 조약을 체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데 제한했다.
711년 사라센족은 Guadalete 전부에 서고트족을 물리쳤다. 서고트 왕국의 쇠약으로 인해 720년에 이슬람교도들은 이미 거의 모든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로마인의 이베리아반도 도래는 기원전 281년으로, Gnaeus Scipio가 지휘하는 부대가 Empúries에 상륙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 카르타고인 또는 포에니족이 Cartago Nova를 건설했다. 처음에 그들은 로마와 에브로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를 통해 강 북쪽 영토는 로마인에 의해, 남쪽은 카트타고인에 의해 통제되었다. 포에니의 장군 한니발은 이 조약에 불복종했고, 이로인해 기원전 209년 Cartago nova는 로마에 정복되었다.
서서히 로마의 존재는 반도의 나머지 부분으로 퍼졌다. 기원전 3세기에 토착문화의 흡수과정이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원주민이 로마의 법률, 예술 및 언어를 채택하게 된다. 로마화는 1세기부터 바스크지방의 해안 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화되었다.
서기 3세기부터 히스파니아에서도 제국의 위기가 보였다. 새로운 상황으로 인한 쇠퇴를 이용하여 게르만 출신의 서고트족은 472년에 Tarragona 지방을 점령했다.
이베리아 반도로 인한 로마의 이점을 설명하는 첫번째 동기는 군대이다. Empúries로의 상륙은 한니발이 지휘하는 포에니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려했었기 때문에 후방지역을 위해 카르타고와 싸우려는 로마의 의지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의 완전한 영토 지배에서, 정복의 본질적인 이유는 이베리아 반도가 제공하는 많은 양의 천연자원 및 인적자원 사용을 위함이었음은 분명하다.
로마 사회경제체제에서 도시는 시장의 중추, 생산의 핵심, 행정의 중심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졌다. 히스파니아 주민들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살았다. 따라서 로마식 경제를 택한 도시경제는 노예화된 인력으로 상업화와 천연자원의 집약적 획득을 촉진하였다. 상업과 군사기능을 갖춘 효과적인 도로망이 없었다면 무역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또한, Tàrraco, Cargo Nova 및 Cadir와 같은 중요한 항구와 함께 해상 교통이 두드러졌다.
로마 사회경제적 분야를 특징짓는 부문은 기본적으로 세가지이다 :
로마사회는 이원적이었다 : 대략 50%의 비율(서기 1세기까지)의 자유로운 개인과 노예로 구성되었다. 사회집단은 다음과 같았다.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여러 지방으로 나뉘었으며, 지방의 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했다. 기원전 197년에 첫 번째 지방 분열이 이루어졌으며, Hispània Citerior (Tàrraco가 수도임)와 Hispània Ulterior (Cartago Nova가 첫번째 수도, 이후는 Códoba임)라는 두개의 지방이 출현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새로운 분열이 일어나 세개의 지방이 세워졌다 : 베티카 (수도: 코르도바), 루시타니아 (수도: 메리다) 및 타라코넨세 (수도: 타라고나).
세번째 분열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인 297년에 실현되었으며, 그는 타라코넨세를 세분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Bàtica, Lusitània, Tarraconense, Gal·lència, Cargaginense 및 Baleàrica (Balears섬 및 Pitiüses섬).
콘베투스는, 후기 로마제국시대까지, 주에 나누어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모든 주는 콘벤투스으로 세분화되었고, 영토에 따라 이들의 기능은 다양했다. 예를 들어, la Bèticasms 4개 (Godes, Còrduba, Hispalis i Astigi), la Lusitània는 세개 (Emèrita Augusta, Scallabis i Pax Augusta) 또는 la Hispània Citerior는 7개 (Bràcara Augusta, Lucus Augusti, Astúrica Augusta, Clunia, Cesaraugusta, Cartago Nova i Tàrraco)로 나뉘어졌다. 그들이 지방을 세분화하는 기준은 다양했다 : 콘벤투스의 수도와 도시의 원활한 의사소통 또는 공통적인 문화적 특성. 이들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사법행정을 용이하게 하고, 모집단위로 작용하게 하며, 세금 징수 수행 등.
아우구스투스가 히스파니아를 분할했을때 그는 시민과 대중을 하위 행정단위로 구분했다. 민중은 원주민 자치 정부를 상당히 존중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은 해당 분할을 존중했으나,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 일부 대중 또는 시민의 소멸 또는 새로운 단위를 만들기위한 분열. 로마의 지배적인 시스템은 특정인구가 시민이 될 수 있게하고, 식민지 또는 뮤니시퓸(본래는 도시국가였으나 로마에 예속하게 되면서 자치권이 부여됨)이 되도록 허용하면서 특권 도시의 범주를 획득한다. 이는 Tortosa의 경우이다. 뮤니시퓸은 대도시의 모델에 따라, 의회와 사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모든 식민지가 앞서 언급한 진화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일부 식민지는 재건되었고, 이민자나 허가받은 군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Hispalis와 Tarraco의 경우에 속한다. 재정 측면에서 도시의 조세 상황은 “liberae (일반 세금을 내지 않아도됨)” 또는 “Stipendiaria : 급여 (납세 대상)”가 될 수 있었다.
도로망의 건설과 로마법은 로마화를 가속화 시킨 요소였다. 처음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 거주자들의 특권일 뿐이었으나,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안토니우스 헌법을 통해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해당 헌법은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부여한 Ius Latii Minus와 함께 로마 도시 모델에 따라 로마 지방 자치 단체의 행정을 구조화 했다.
후기 로마제국 동안 로마법의 법규는 정치, 군사, 행정, 시민 및 경제 조직을 지배했다. 사법 체계 내에서 로마법은 계층화를 확립했다 : 해당 계급의 상부에는 황제가 있었고 그 밑에는 지방 판사가 있었다. 행정업무는 지역 의회인 쿠리아(Curia)에서 수행했다.
로마법은 몇몇 개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예로, 로마법은 카딸루냐와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의 기반이 된다.
정복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는 이베리아 언어를 대체했다. 일상적인 문서를 작성하는데 일반 대중의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공증인이나 서기관이 교양적인 특징을 사용했다. 라틴어는 작가들에의해 교양있게 사용되는 문학과 구별되었다. 점차적으로 인구는 일반 대중의 라틴어를 자신의 언어로 채택하였으며, 이는 히스파니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제국의 다른 언어들과 다르게 만드는 음성, 형태적 및 구문적 변화를 도입했다. (기질 언어의 영향으로 인한 변화).
일반 대중의 라틴어에서 로망스로 알려진 언어 – 반도에서는 까딸란, 갈리시아어, 까스티야어(스페인어) 및 포스투갈어-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언어적 다양성은 기원을 알수 없는 로마이전 언어인 바스크어로 보완되는데, 이는 바스크 지방의 대부분이 로마화되지 않은 덕분에 유지되었다.
제국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결국 황제를 신격화했다. 로마인은 토착신앙을 존중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의식 또한 도입했다. 그들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에서 파생되었으며, 상인, 군인, 판매자 등이 동양권 종교의 특유의 특징을 더하였다.
기독교는 1세기 경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비교적 더욱 로마화된 도시 중심이었고, 해안지역과 신분이 낮은 지역 안에서 더 열렬했으며, 산악지역에서는 여전히 이교도 숭배가 존재했다. 4세기까지 기독교는 여러 황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이베리아 반도와 제국의 나머지 지역에 침투하여 영향력을 키웠다. 313년 밀라노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로 인해, 1년 후 일리베리스(그라나다)에서 히스패닉 교회의 첫 번째 공의회(*)가 열릴 수 있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제국의 유일한 국고로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4세기부터 교회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 ius Latii 또는 ius latinum : 라틴 시민권
(*) Latium minus : 행정관직을 가진 자만이 로마 시민권이 수여됨
(*) Curia [쿠리아] : 고대 로마 시민의 구분 단위
Vulgar :
1) 상스러운, 비속한, 저속한, 천박한
2) 평민의, 서민의
3) 일반의, 일반 대중의
(*) 공의회 : 전 세계의 가톨릭 교구 지도자나 그들의 위임자 및 신학자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 정의 결정하는 회의
모든 로마 예술과 마찬가지로, 로마 건축은 특히 헬레니즘 시대와 동시에 중동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멘트 및 구운 벽돌과 같은 새로운 재료는 구조를 보다 유연하게 만들고 건설 시간을 단축했다.
로마 건축의 최대 표현은 공공 기념물이었다. 극장은 그리스 모델을 따라 지어졌다. 원형극장은 원형 평면도와 무대 아래 수많은 복도가 있는 두 개의 극장이 결합된 산물인 로마의 혁신이었다. 그 곳에서 결투 및 게임을 했다. 예시로 타라고나의 원형경기장이 있다. 말과 마차 경주, 운동 경기를 위한 서커스장는 그리스 경기장을 개조한 것이다. 도시로 물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던 많은 수로가 매우 견고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것은 타라고나 근처의 Farreres 수로의 경우에 해당된다.
건축물에는 업적을 영속시키려는 열망에 부응하는 개선문, 기둥 또는 사원과 같은 기념물과 종교 기념물도 포함되어야 한다. 카탈로니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것 중 하나인 로마의 빅(Vic)사원과 베라(Berà)의 개선문 등이 있다.
도시화에서는 최초의 도시들은 지형에 적합하게 되었고 명확한 도시계획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인 밀레투스의 히포다무스가 고안한 격자형시스템을 적용하였다. 도시들은 두 개의 축, 즉 데쿠마누스와 카두스를 기준점으로 삼았고, 그들이 교차한 곳에는 도시의 행정적,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인 포럼(*시민들이 모여 정치의사에 대하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포럼이라는 광장)이 있었다.
조형예술은 사실주의 특징을 갖는다. 1세기부터 석관의 부조가 중요해졌다.
그리스영향을 받은 조각품은 공화정 시대부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서기 2세기)까지 지배적이었다. 그 이후로는 정보 기능을 했다. 가장 눈에 띄는 예 중 하나인 트라야누스의 원주는 나선 모양으로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일련의 부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황제의 승리(*113년에 완성된 이 원주는 다키아 전쟁에서의 트라야누스 승이를 기념하는 부조)를 설명한다. 로마 조각상 내에서 초상화는 가장 빈번한 주제였으며 널리 퍼진 사실주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회화의 경우, 특히 3세기부터 궁전과 사원의 실내 장식과 함께 두각을 나타냈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들은 프레스코화(*a fresco(방금 회를 칠한 위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로 젖어있는 신선한 석회 벽 위에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안료가 젖은 석회에 스며들어 건조 후에 정착되게 하는 기법)로 만들어졌으며 왁스를 덧질하여 보호되었다. 인테리어, 특히 바닥 장식을 위해 또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널리 사용되는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했다.
로마 제국은 영토확장이 끝난 3세기 중반에 약화의 첫 징후는 보였다. 그 순간부터 로마인들은 외국 제품이나 노예 노동에 의존할 수 없었다. 세금이 인상되고 통화가치가 하락하면서 많은 소작농 지주들이 파산했고 라티푼디움(Latifundium : 대토지소유제도)으로부터 보호를 구했다. 따라서 인격적 종속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위기의 결과로 상업 및 공예 활동도 크게 감소했으며 서부 지역에서는 사회의 농촌화 과정이 가속화 되었다. 반면에에 로마만큰 값비싼 군대를 유지하는데 드는 높은 비용과 북유럽 국경에 대한 게르만 민족의 압력은 로마의 쇠퇴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은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반란과 투쟁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제국의 전반적인 위기는 히스파니아에서 큰 영지의 증가, 무역의 감소, 도시의 쇠퇴와 함께 나타났다. 가장 피해를 받은 사회 집단은 종종 게르만 민족과 동맹을 맺었고 행정부와 가장 특권층에 대해 일련의 반란 (Bagaudes)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히스파니아에 대한 최초의 게르만 침약은 409년, 특히 알란족, 반달족, 수에비족에 의해 시작되어서 서고트족이 영구적으로 정착한 507년에 끝났다.
서고트족은 로마제국의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히스파니아를 점령했다. 415년 아타울프 왕은 바르셀로나에 수도를 세웠다. 472년에 그들은 이미 타라코넨시스 전체를 장악했고, 507년에는 갈리아에서 프랑크에게 패배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수에비족이 세운 왕국이 몇 년 동안 존속했던 갈리시아를 제외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북부 피레네 산맥에서 서고트족은 계속해서 셉티메니아 지역을 지배했다.
인구통계학적 점령 이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족 통치는 로마인의 권력구조를 이전의 특권을 유지했던 지역 추장들과 동의한 새로운 당국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토착민이 지배에 저항할 때만 폭력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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