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스페인 역사ㅣ4. 서고트족의 유산

1) 서고트 왕국

연대학적 및 지리학적 환경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고트족의 지배는 5세기 초부터 711년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 군대가 패배하면서 시작된 사라센(*중세의 유럽인이 서아시아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의 점령까지로 길지 않았다. 사실, 714년에 사라센인들은 현재의 바스크 지방과 피레네 산맥에서 칸타브리아 산맥 북쪽의 작은 줄기를 제외하고 이미 반도를 지배했다.

 

영토 범위 측면에서 서고트족의 왕궁은 항상 반도뿐만 아니라 피레네 산맥의 군주국이었다는 것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 첫 단계에서 톨로사 시(*바스크지방)에 수도를 두고 507년 프랑코족에게 패배하기까지 갈리아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였으며, 피레네 산맥 북쪽 셉티메니아 지역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이동하여 톨레도에 수도를 세웠다. 415년부터 서고트 왕국의 수도는 바르셀로나였다. 

수에비족, 반달족 및 알란족과의 싸움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한 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서고트족은 반달족과 알란족을 정복했다. 전자는 그들이 지배한 영토인 베티카, 카르타고, 루시타니아에서 쫓겨난 후 북아프리카로 이주해야했다. 고대 갈리시아에서만 수에비 왕국이 몇 년 동안 통합되었으며,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스페인-로마인들과의 공존을 촉진했다. 처음에 그들은 서고트족과 협정을 맺었지만 456년 테오도리쿠스 2세 왕이 아스토르가 근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 왕국은 속국이 되었다. 

 

발레아루스 제도는 서고트족이 아니라 짧은 기간동안 반달족이 점령했다. 사실 발레아루스 제도는 한동안 반도 남동쪽을 지배했던 동로마제국이나 비잔티움에 수년 동안 남아있었다. 

문화

서고트족의 문화적 채택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문화 세계는 특히 기독교로 개종한 후 더 준비된 (신분)계층의 손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교들과 수도원은 고전문화를 보존하고 보금하기 위해 모든 노력이 집중된 곳이 되었다. 이시도루스 히스팔렌시스의책 <Etymologiae>(*세비야의 대주교를 지낸 사람으로 백과사전적인 저술이 “어원(Etymologiae)”를 써서 고대의 학문과 지식을 중세에 전하는데 기여함)를 예로 들 수 있다.

 

반면에 가톨릭 교회의 패권으로 인해 상당량의 작품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Just d’Urgell, Quirze de Barcelona, Justinià de València 및 Girona의 주교인 Joan de Bíclar와 같은 작가들의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비잔틴 문화의 영향력도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고트족은 금은세공술에서 일정 수준을 달성하였다. 금속 작업과 관련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장식용 및 실용적인 도구를 많이 남겼으며, 이는 보석을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지 보여준다. 톨레도에서 발견된 소위 구아라자르의 보물인 봉헌 왕관(*스페인 마드리드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금은세공술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서고트족의 건축은 경제적 퇴행으로 인해 중요도가 낮다. 서고트족은 초기 로마 건축물을 사용했으며, 절단석과 말굽아치(*Arco de herradura (영문 : Horseshoe arch) : 무어아치 및 열쇠구멍아치라고도 하는 말굽아치는 이슬람 건출, 특히 무어 건축의 상징)를 사용하여 새롭고 매우 대칭적인 것을 만들었다. Barcelona, Terrassa, Xàtiva, València 또는 Elx와 같은 도시에 유적이 남아있다.

2) 정치-사회적 조직

사회적 단체

서고트 시대에 헤게모니적(*주동적인 위치에서 권리나 권력을 이끌어 나가는) 사회구조는 로마 제국 말기에도 유지되었는데, 이는 개인적인 의존 관계를 확립한 지주 귀족의 명백한 패권이었다.

위계적이고 군사화된 사회였다. 고트족 귀족, 히스파노-로마 귀족, 고트족 군대, 자유인 (그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도시에서 무역과 공예에 종사했다)과 농노 상당히 중요한 소수는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서고트족 인구는 많지 않았다. 약 600만 히스패닉 인구 중 200,000명 미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주로 카스텔라 중심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 중앙 시스템의 양쪽, 바에티카의 일부 특정 지역, 바스크족과 칸타브리아인과의 경계에 정착했다. 그들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로마 귀족들과 협정으 맺고 가톨릭 교회와 유대를 맺어 권력을 독점했다. 사실, 많은 도시의 영토는 종종 교구의 영토와 일치했으며, 주로 스페인-로마계 상류층 출신의 주교들이 행정, 재정 및 사법 영역에서 권한을 가졌다. 589년 제 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서고트족은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사회 생활에서 교회의 존재는 그때부터 이 제도가 서고트족 군주제에서 우세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했다.

법전

서고트족이 스페인에 도입한 최초의 법전은 475년의 에우릭 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입법적이나 대중적 성격을 띄며 고트족 출신의 인구에게만 적용되었다. 선택적군주제를 확립했으며, 이 때문에 왕위 계승을 위한 귀족들 사이의 분쟁이 빈번했다.

이는 세습 군주국이 될때까지 로마 문화와의 계약을 통해 수정되었다. 사회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감안할 때 외회를 모으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Aula Regia (*왕실 위원회) 및 Officium과 같은 공공기관이 중요하게 되었다. 

506년에 알라리크 법전이 공포되었다. 서고트족과 히스파노-로마인 사이의 분리가 여전히 지속됨에 따라 레케스빈투스의 통치기간인 656년에 리베르 루디시오룸 (Liber ludiciorum)이라는 법전이 만들어졌으며, 이로써 법적 통일이 이루어졌고 법 앞에서 서고트족과 히스파노-로마인들이 차이점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토 조직

서고트족은 로마의 속주 구분을 존중하고 각 속주에 공작 (대개 일반적으로 왕의 직계 친척)을 세워 그를 대리하도록 했다. 백작은 행정을 담당하는 교구장과 개인 군사 감시를 담당하는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작은 마을과 영토를 다스렸다. 한편 왕은 재정, 사법, 군사 기능도 지방 기관에 위임했다.

세우타와 같은 북아프리카의 도시들도 서고트 왕국의 일부 였다.

Llunalila.k

Recent Posts

사랑니를 뽑았다

사랑니에 대하여 "3번째 어금니"라고도 불리는 한국어로는 "사랑니", 영어로는 "Wisdom Tooth (지혜의 이)", 스페인어로는 "las Muelas…

6일 ago

도심 속의 자연 센트럴 파크, 아이와 갈만한 곳, Central Park Zoo, Tisch Children’s Zoo

Membership (+ Promo code) 22년 이후로 1년 쉬고, Bronx Zoo 멤버십을 재가입했다. 미국의 어느 곳이든…

7일 ago

뉴욕 맨해튼에서 스시먹으러 가는 곳, Hatsuhana

19년 10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온 "Hatsuhana"에서의 저녁은 근사하고 맛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초밥, 달고…

1주 ago

코네디컷 미스틱 타운에서 피자먹고 올데 미스틱 빌리지 (Olde Mistick Village) 구경하기

Mystic Pizza 뉴저지에서 2시간 45분 달려 도착한 여행의 첫 도착지는 코네디컷의 미스틱 피자. 이 곳은…

2주 ago

Jiangnan, 뉴저지 맛집, 차이니즈 쿠진 지앙난, 메뉴 추천

옆 팀이 회식으로 다녀와서 맛있다며 추천해준 곳, 우리 팀도 9월자 생일축하 겸 점심 회식으로 예약했다.…

2주 ago

뉴욕 복숭아 픽킹, 와이너리, 우리의 푸르고 달콤한 주말

Peach picking near NYC 늘 주말에는 뭐하지 고민하고 미리미리 준비해야하는 엄마의 삶. 회사 점심시간에 아무…

2개월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