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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증언집 같은 소설

2025년 새해에는 책을 읽기로 했다. 엄마여서, 집안일이 많아서, 일이 바빠서, 틈만나면 유튜브에 빠져있지 않고 글씨를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새해가 2주 앞으로 다가온 오늘부터 실행되기 시작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떠들석할 무렵, 그녀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본적 없는 나는 그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축하했다. 그래도 그녀의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요즘 ‘전쟁’과 ‘북한 인권’에 대한 유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그 알고리즘은 <소년이 온다>라는 책이 어떤 내용인가 궁금하게 되도록 나를 이끌었다.    

하루만에 완독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는 독자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있었다. 

어제 아이를 재우고 15% 정도를 읽고 잠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괜찮았다. 

 

회사 점심시간, 원래는 팀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가지만, 오늘은 혼자 앉아 아이패드를 켰다. 오늘의 메뉴는 토마토 소스의 치킨 파마산 스파게티.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점심시간 동안 85%까지 읽었다. 그리고 그 동안 나는 다섯 번 정도 포크를 내려놨다. 음식은 반 이상을 남겼다. 분명 배고팠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이유를 찾으라면 잔인 장면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 편안하게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보통의 내 모습이 죄스러웠다. 

 

잔인한 장면은 되도록 머리 속에서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슬픔이랄까, 억울함이랄까, 원통함이랄까, 어떤 표현이 잘 어울리는 걸까. 그런 감정은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작가의 언어가 꾸며낸 소설이 아니라 그 날, 그 곳에 있었던 그들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래 인용 글이 나를 무너지게 했다.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에서 밥에서 피비린내가 난다는 베트남 전쟁 생존자 할머니의 증언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졌던 십대의 내가 기억났다. 왜 우리 인간은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가.  

 

 그러니까 인간은, 그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 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 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 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중간 생략)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지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한 후 집에 왔다. 아이가 혼자 어제 함께 만들었던 레고를 부숴서 다시 무언가 만들고 있는 사이에 네가 먹고 싶다는 떡국을 끓이며 나머지를 읽었다. <6장 꽃 핀 쪽으로>, 동호 엄마의 마음을 읽는 내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과 볼이 붉어질정도로 조용히 울었다. 아들의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날, 그 곳에서 그를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 그 인간에 대한 원망… 눈물로 앞이 뿌옇게 되면 티슈로 닦아내고 코를 훔치며 읽기를 반복했다. 

고작 하루만에 책을 다 읽었다. 소설 책을 읽은 느낌이 아니라 고증된 다큐멘터리를 본 느낌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들의 아픔이 나에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세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담담하게, 억지로라도 다시 기운을 차려야한다.

한강 작가의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아래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든 그들을 한없이 원망한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 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이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Llunalil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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